카테고리 없음

마술과 미신

김덕례 2021. 3. 30. 22:13

5세기에서 15세기 사이의 유럽에서 과학, 특히 의학의 발전은 거의 없었다.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몇몇 의과대학만이 번창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이탈리아의 살레노스, 프랑스의 몽펠리에(1167년 경), 이탈리아의 볼로냐(1158년)와 파도바(1222년)가 유명하다. 그러나 일상적인 의료는 약초와 마술과 종교의식이 뒤범벅된 상태였다. 이 시대의 초기 의학 사상은 갈레노스의 프네우마 이론과 체액설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 차차 질병이란 인간의 죄악에 대한 신의 단죄라는 크리스트료 사상으로 바뀌어 갔다. 

육체는 죽은 다음의 영혼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진단과 치료는 대부분 미신, 종교적 상징, 치유성인에게 드리는 기도에 기대고 있었다. 수녀원,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공공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지역도 있었다.

 

위석 : 염소, 양, 소 같은 동물의 위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돌인 위석은 병의 원인이 되는 인체의 독을 없애는 마술적인 힘이 있다고 전해졌다. 사람의 신장, 쓸개, 방광 같은 기관에 있는 결석도 비슷한 힘이 있다고 여겨졌다.

 

흑사병과 포맨더 : 1320년대에 몽골과 중국을 휩쓴 치명적인 흑사병이 아시아를 가로질러 20년 뒤에 북유럽에 창궐했다. 그것은 림프절페스트로 쥐벼룩에 의해 전염되어 7000만 명 이상의 유럽인이 죽었다. 크리스트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죄에 대해 신이 내린 벌이었다. 포맨더는 금과 은으로 만들었다. 포맨더는 꽃잎과 약초로 채웠다. 좋은 냄새로 공기를 깨끗이 하고, 페스트를 막고, 시체에서 나는 악취를 막으려고 포맨더를 가지고 다녔다. 

 

피를 흐르게 하라 : 고대의 일반적인 치료 방법이었던 사혈은 중세에도 마찬가지였다. 사혈의 기본적인 원리는 몸속의 독이나 남아 도는 피를 빼내 체액의 균형을 되찾는 것이었다. 병에 따라 혈액을 빼내는 부위가 달랐다. 사혈을 할 때에는 다양한 시험용 칼과 피를 천천히 뽑아내는 거머리를 이용했다. 사혈은 19세기까지 성행했다.

 

소변검사 : 중세의 의사들은 환자에게 증상을 묻고, 환자를 관찰하며 맥박을 재기도 했지만, 진단할 때에는 소변검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소변검사를 할 때 유의할 점은 색, 부유물, 냄새, 맛 따위를 포함해 30가지가 넘었다. 이것은 진단의 기초가 되었고 치료 방법의 길잡이가 되었다. 소변을 담는 플라스크는 여러 지역에서 의사의 상징이 되었다. 소변검사는 19세기까지 성행했다. 

 

인두 : 쇠가 붉게 달아오를 때까지 달군 다음에 피가 흘러나오는 궤양이나 절단 부위에 댄다. 그러면 상처 부위가 타면서 피가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는다. 

 

치유성인 : 중세에는 병이 나면, 성인에게 기도를 드리거나 봉헌물을 바치고는 했다. 치유성인으로 알려진 코스마스와 다미아누스는 쌍둥이였다. 그들은 무료 의료봉사로 유명했으며, 303년경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크리스트교를 박해할 때 순교했다. 

 

성직자는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간호하고 축복해 주었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성체와 포도주를 나누어 줄 때 쓰는 손잡이가 달린 긴 성찬 도구 따위를 이용해 환자들과 항상 팔 하나 이상의 거리를 유지했다.